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765화(765/920)
매흉 (4)
잠시 후, 우리 앞에는 요한 경의 지인이자 판테온의 신관인 힐다가 서 있었다.
“누더기 아가씨요? 최근에 판테온 구역에서 종종 발견되는 광인이에요.”
“예?”
그녀는 커다란 광주리 같은 것을 옆구리에 끼고 올라왔는데, 안에는 말린 과일이며 치즈 같은 것이 제법 들어 있었다.
듣자니 판테온의 신관들이 ‘힐다의 손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신 것이란다(그러니까 우리는 고작 하루 만에 들킨 셈이다).
가뜩이나 이곳 일을 돕지도 못하는데 받기만 하는 게 죄송해서 한사코 거절했지만, ‘주시는 분들의 성의’라는 말에는 이길 수가 없었다.
평소 주전부리를 좋아하는 지브릴 디오프는 곧바로 건과일을 입에 털어 넣었다.
세드리크는 육촌을 한참이나 지켜본 뒤, 그가 구토나 혼절 등의 증세를 보이지 않는 것이 확실해진 다음에야 우리의 시식을 허락했다(“뭐야, 날 이용했습니까?”). 요한 경은 손도 안 댔지만.
“광인이라면, 저분이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내가 다목적실 창밖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다 찢어진 로브를 걸친 낯선 여인이, 신전 로비를 벌써 이십 분째 배회하고 있었다.
힐다는 빈 광주리에 마른걸레를 몇 장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나이에 집도 가족도 잃은 것 같더라고요. 제대로 기억하는 게 거의 없어요. 스네이더르 공작저가 무섭다는 말만 반복하고 다니는데, 왜 무섭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전혀 못 하고요. 그 댁에서 쫓겨난 하인인 건지······.”
“저분을 아는 사람은 없나요?”
“신관 중에는 없어요. 판테온 방문객이 좀 많아야죠.”
힐다가 머리를 저었다.
하기야 이런 대규모 종교 시설에서 일하며 모든 신자의 얼굴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꽤 독실한 신자라, 하루에 한 번은 저렇게 와서 기도를 올려요. 무기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우리도 저이를 쉬어가게 두는 거죠.”
그 말에 세드리크가 날카롭게 물었다.
“치유를 시도한 적은 없나?”
“당연히 해봤어요. 우리 가운데 영혼 치료를 전공한 친구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릇 자체가 워낙 닫혀 있어서······.”
“아.”
“네. 뭔가 정신적으로 크게 충격받은 일이 있었나 봐요. 깊이 살필 수가 없었네요.”
“······.”
깔끔하게 대답한 힐다가 다시 광주리를 품에 안았다.
우리에게 더 궁금한 것이 있는지 묻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요한 경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는데, 그는 은은한 미소로 친구들을 돌아볼 따름이었다.
일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셈이다!
나는 냉큼 머릿속 질문지를 펼쳤다.
“저, 힐다 씨. 발렌틴 가문 말입니다.”
“발렌틴 자작가요?”
“네. 소문을 들으니 자작의 따님과 손녀분이 근방에서 유명하신 것 같던데요.”
“오, 유명한 정도가 아니죠. 어제 도로테아 공녀님 보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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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눈알을 굴리며 웃었다.
“공녀의 어머니는 자작의 외동딸인 헤라르다 님이에요. 소자작으로 공표된 적은 없지만 다들 그분이 가문을 이을 거라 예상하죠. 왕도에서는 영웅이나 다를 바 없고요.”
“영웅요? 어제 밖에서 들은 바로 그분은 참전 용사도 아니라고 하던데요.”
가인 씨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힐다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왕도 사람들에겐 참전 용사만큼이나 멋진 분이랍니다. 그분이 이곳 자경단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거든요.”
“우와······.”
-끼아······
레아와 나의 입이 헤 벌어졌다. 나는 신수의 턱을 닫아주며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럼 혹시, 우리가 멀찍이서 보았던 사거리 모퉁이의 그 자경단도······.
“아니, 어쩐지 칼 들고 뛰어드는데 아무도 뭐라고 안 하더라니. 대단한 사람이었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낮에는 기사와 지원병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타락자들을 해치운다고 들었어요. 아마 왕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도움을 받았을 거예요. 그분하고, 로세하르더 백작가의 둘째 공자님하고. 모두가 흠모하죠.”
“로세하르더 둘째 공자님은 또 왜요?”
가인 씨의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왕도 밖 장미원에서 온갖 보급품을 싣고 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시거든요. 촉망받는 주교인데 워낙 덩치가 좋아서, 힘쓰는 일도 잘하세요. 성격이 조금 까칠하기는 해요.”
마지막 문장은 입속말에 가까웠다.
로세하르더의 둘째라면 우리네 산트에게는 작은 형님이다.
궁정백의 아들답게 모범을 보이고 있구나.
“······그나저나 헤라르다 공녀의 아들이 그제 밤부터 실종 상태라는데, 우리도 어제 알았네요. 도로테아 공녀가 여기까지 와서 생떼를 부린 덕분에요.”
‘정말 안됐어요. 어서 찾아야 할 텐데.’ 힐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우리의 궁금증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간단히 인사했다.
나는 재빨리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힐다 씨, 혹시 베르너르 페네티안 국서에 관한 소문은 못 들으셨나요?”
“······국서 전하요?”
그녀가 심히 당혹한 낯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럴 만한 질문이었다.
명백히 제국에서 밀입국한 사람들이, 무려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된 왕족에 관해 묻고 있으니까.
“아는 대로 대답하는 게 좋아.”
“맙소사, 아는 게 있어야 답하지!”
요한 경이 경고하자 힐다가 어깨를 움츠리며 항변했다.
“미안해요, 잘생긴 분. 나는 그분이 신국 어딘가로 달아났다는 이야기밖에 몰라요.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들었어요.”
“괜찮습니다. 정보가 있다면 오히려 그게 놀랄 일이겠죠.”
“하지만 그토록 높은 사람이라면 분명 눈에 띌 거예요.”
신관이 턱과 뺨에 단단히 힘을 주며 말했다.
“아무렴요. 왕족과 신관은 기운을 숨길 수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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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다시 판테온 다목적실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대낮에 밖에서 타락자들을 잡고 다닐 수도 없고―그랬다간 친구들도 왕도의 유명 인사가 되겠지―얼굴을 드러낸 탐문 수사 같은 것도 어려우니, 일단은 밤이 될 때까지 여기서 회의하고 전략을 보강할 참이었다.
조금 허술하지만 약속 같은 것도 하나는 잡힌 상태였고.
-착!
-아오옹
낡은 탁자 위에 신국 전도를 펼치자, 로피가 제일 먼저 뛰어 올라와 자근자근 종이를 밟으며 꼬리를 살랑거리고 지나갔다.
이어서 다섯 명의 머리가 한데 모였다.
“어젯밤에 땅을 파보셨다고 하셨죠, 가인 씨. ‘소환진’ 테두리를 따라서요.”
나는 손가락 끝으로 왕도 경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네. 그 무슨 부대······. 집회······. 선동하는 거 듣고 돌아오는 길에요. 진짜 죽을힘을 다해서 팠는데 소용이 없더라고요. 아무리 파헤쳐도 크고 넓적한 바위밖에 안 나옵니다.”
“볼수록 기가 막힌 도시야. 바다와 운하를 끼고 있으니 지반이 약할 법도 한데, 흙바닥 아래 모조리 바위를 깔아서 기초를 다져놨더군.”
“주신의 소환진은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숨어 있겠지.”
‘왕도는 한때 초대 국왕의 영지였으니.’ 세드리크가 덧붙였다.
나는 재깍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소환진의 물리적인 파괴는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
애초에 유리 페네티안처럼 교활한 사람이 그처럼 단순 무식한 파훼법을 남겨둘 리가 없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왕도의 경계를 파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일 순위 목표가 왕성인 건 변함없겠습니다. 또한 베르너르는 현재 팔다리가 한 쪽씩 없는 상태이니 왕도를 샅샅이 뒤지면 잡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그자의 목표 또한 왕성일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움직임에 제한이 있는데, 그를 찾겠다고 시선을 끌게 되면 너무 위험해지겠죠.”
“네. 그리고 힐다 씨 말이 맞아요. 암시장에서도 난리였고 신국 북부에서도 난리였고, 어차피 관종이라 가만히 숨어 있지를 못하는 놈이니까. 잘하면 제 발로 먼저 발견될지도 모릅니다.”
가인 씨가 검지와 중지로 지도 위를 콩콩 내달렸다.
눈이 마주치자 바보처럼 웃음이 샜다.
“관종이 뭔데?”
“‘관심 종자’의 줄임말. 남한테 관심받고 싶어서 일부러 이상한 짓 하는 인간.”
“별걸 다 줄이는군.”
“사람은 누구나 관종 기가 있다. 제비 너도 예외는 아님.”
“왜 시비야?”
“오늘 밤에는 다른 기병대가 왕도에 닿은 흔적이 있는지 살펴볼게요.”
“아, 네. 극장으로 가서 외투실을 확인할 계획이라고 하셨죠. 이름이······.”
두 개의 반지로 빛나는 요한 경의 손이 스르륵 지도를 짚었다.
나는 극장의 이름을 여러 번 입속으로 되뇌었다.
제국의 전시금제인들을 유격대로 보내자는 의견을 냈을 때, 고위 장교님들을 설득하기 좋았던 요소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신국 출신으로 제국에 투항한 귀족들은 왕도의 지형과 특성과 명소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디에 모여야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지, 서신이나 물건은 어디에 보관하면 좋을지.
접선 장소로 삼아도 수상하지 않은 곳은 또 어디인지.
모르긴 몰라도 다들 요한 경처럼 안전 가옥 하나씩은 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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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가 왕성을 공략하는 사이에······. 이자벨 일행은 장미원에 당도하는 거죠. 이쯤인가요?”
-톡톡
“네.”
지금쯤이면 무난히 도착했으려나?
장미밭 깊숙이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면, 한 번은 소환진의 발동을 막아낼 수 있을 거야.
무려 고대의 교황이 직접 준비해 둔 대응책이니까.
“그런데요, 궁주님. 그 꼬마 아가씨가 오늘 진짜 올까요?”
느리지만 분명히 진행되는 계획을 되짚으며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가인 씨가 불쑥 물었다.
마침 세드리크도 그것이 궁금했는지 목을 기울였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며 씩 웃었다.
“도로테아는 고집 센 떼쟁이지만, 한편으로는 성취욕이나 자신감이 대단한 아이입니다. 그 나이에 칼을 들고 다니면서 자기가 직접 동생을 찾아오겠다고 드러눕기는 쉽지 않거든요. 단순히 말을 안 듣는 수준을 넘어서, 본인 손으로 뭔가를 해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어른들에게 유의미한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거죠.”
“아하.”
“그래서 제가 제안했습니다. 우리 일행에게 몰래 협력해주면, 저 또한 동생을 찾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요.”
정확히는 이렇게 말했다.
‘도로테아 공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습니다. 저도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크흥······. 무얼 이런 걸 가지고오······.’
‘유모분도 정말 자랑스러워하시네요.’
‘흥······. 테아가 바보인 줄 알아. 그냥 막 소리 지르는 게 능사가 아니거등? 킁.’
만두 머리 소녀는 ‘능사’라는 단어를 최근에 자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아이의 어휘력을 열심히 추켜세워 주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저와 친구들은 사실······. 신국에서 꽤 알아주는 고급 인력입니다. 하지만 공녀님께서만 비밀로 해주신다면 예프 공자를 찾는 데 필요한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무보수로요.’
‘······고급 인력······. 무보수?’
아이에게는 아직 너무 어려운 단어였다. 물론 내가 일부러 그런 단어만 골라 썼다.
미안합니다, 도로테아 양.
‘지하 세계의 최고급 용병 길드, 소맥.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미치겠다! 갓난아기한테 우리 길드 얘기를 하셨어요?”
-끼아!
‘그걸 또 써먹으셨어!’ 가인 씨가 그대로 탁자에 엎드러져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당시 자리에 있었던 페리도 오도도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디오프가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었고, 요한 경도 재미있어하는 얼굴이었다.
세드리크는 말없이 한쪽 눈썹을 까닥였는데 그건 그가 나의 임기응변을 썩 흥미롭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당장 떠오르는 게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법 괜찮은 제안 아닙니까?”
우리에겐 잃을 게 없었다. 적어도 내가 돌린 시뮬레이션으로는 그랬다.
“태자님,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았던 그 누더기 아가씨가 수상하다고 하셨죠. 스네이더르 공작저 운운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고 하셨고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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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씨, 헤라르다 발렌틴 공녀가 시트룬 후작을 상대로 상당히 공격적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스네이더르 세력에 대한 반감이 훨씬 커 보였다고요.”
“맞아요, 크흠, 맞습니다.”
물방울 짝꿍이 헛기침하며 답했다. 나는 안경을 고쳐 쓰고서 검지로 허공을 짚었다.
“저는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써먹을 생각입니다.”
-똑똑똑!
바로 그때, 누군가 다목적실 문을 빠르게 두드렸다.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힐다라면 이런 식으로 노크하지 않을 텐데?
“들어갈게!”
곧이어 새침한 목소리가 문밖을 울렸다.
가인 씨와 디오프가 얼빠진 표정을 짓는 찰나―
-발칵!
“테아 왔어, 동네 아저씨! 거래하러 왔어!”
“왐마······.”
두 눈시울이 퉁퉁 부은 아이가, 유모와 힐다를 대동하고서 문가에 서 있었다.
“······바로 저 아이를 이용해서요.”
나는 나름대로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렸다.